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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성씨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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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근현대인물

가문의 근현대인물

성기열(成耆說)

1929∼1991. 국문학자. 호는 수여(水余). 경기도 양평(楊平)출신. 낙원(樂元)의 손자이며 필경(必慶)의 둘째 아들이다. 1949년 휘문 중학교를 거쳐 1955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1968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1979년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 민중서관에 입사해 이희승 감수의 《국어대사전》의 기획을 담당했고, 1957년 균명고등학교(현 환일고등학교) 야간부 교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모교인 휘문고등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1968년 광주에 있는 대건신학대학 교양과 조교수로 부임했다가 1969년 인하공과대학 교양학과 교수로 옮기고, 1973년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임명되어 사망하기 전까지 재직했다. 1974년에는 일본 톈리대학(天理大學) 외국어학부 조선어학과의 초빙교수로 도일하여 약 1년 동안 체류했다. 인하 대학신문의 주간·출판부장·사범대학장·교육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일본 방문 7차, 대만 방문 4차, 홍콩 방문 1차 외에 1986년 4월과 1988년 3월 및 1989년 4월에는 서독의 보쿰대, 네덜란드의 라이든대학, 영국의 런던대학에서 각각 개최된 재구한국학회(AKSE)에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업적은 주로 설화분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역사지리학파의 연구방법론을 원용한 한·일 민담의 비교연구에 많은 공헌을 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구비전승의 연구(1976)》·《한일민담의 비교연구(1979)》·《한국민담의 세계(1982)》·《한국설화의 연구(1988)》 및 《유연 有綠(1989)》이 있고, 공저로 《민담학개론(1982)》과 《한국·일본의 설화연구(1987)》가 있다.

성낙서(成樂緖)

1905∼1988. 유학자·정치가로 호는 운정(芸庭). 충청남도 공주출신으로 고향에서 한학을 배운 뒤,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예과를 수료하고, 1930년 동 대학 법문학부 조선사학과를 졸업했다. 그해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를 거쳐,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전임해 9년간 유학 등을 가르쳤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대전으로 내려왔다. 그동안 아버지 보영(普永)이 마련한 독립군의 군자금을 인천부두에서 상해임시정부의 밀사에게 전달했고, 이왕직이 위촉한 조선음악서 편찬을 맡았으며 아악에 조예가 깊었다.

1945년 광복 후 대전보문중학교를 설립해 초대교장에 취임했고, 다음해 국학대학 교무처장,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충남도지사로 취임하고 충남대학교 총장서리를 겸해 2년간 농촌소득증대와 초창기 충남대학교 부지 선정과 건물 신축에 주력했다. 1955년 충청남도 향교재단 이사장, 1966년 대한적십자사 충청남도 지사장, 1968년 성균관 이사장, 1970년 성균관장으로 선출되어 6년간 한국 유림의 대표직에 있었다.

성균관장 재임 중에 유교의 생활화·현대화를 표방하고, 민족의 얼을 바탕으로 경전을 현대적으로 해석·실천해야 한다하여 성·경·애·정신(誠·敬·愛精神)을 기초로 하여 윤리선언을 공포했다. 1980년 한국공자학회장을 역임했다.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1974년 대만 문화대학과 1982년 충남대학교로부터 각각 명예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보문산에 있는 송병선 순국비문 등을 남겼다.

성낙훈(成樂熏)

1911∼1977. 한학자 및 동양철학자로 호적명은 경조(庚祚)이고, 자는 자목(子沐) 호는 방은(放隱)이다. 경상남도 함안 출신으로 아버지 만영(晩永)과 어머니 재령 이씨의 맏아들이다. 한학을 독학해 동양의 문학·사학·경학·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며, 특히 전고(典故)에 있어서 당대의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유교·불교·도교 철학에 정통했으며, 불교철학에 더욱 심취했다.

1926년에 일본·만주 등지를 일주하고 돌아와 1928년 경주 안씨 춘화의 둘째딸과 결혼했다. 1929년 금강산에 입산해 불교경전을 공부했으며, 1930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해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 중문과 조교에 임용되었고, 고려대학교·성균관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했다. 1952년에 전북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했고, 당시 6·25사변으로 부산에 피난했던 성균관대학교의 동양철학과 조교수에 겸임되어 전주지역에 있던 전시연합대학의 학생을 지도했다.

1953년 경북대학교 철학과 전임강사·조교수를 거쳐 1964년에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교수로 옮겼다가 1969년에 사직했다. 경북대학교 40년사에 “선생의 강의는 무소불통의 해박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나날이 그 인기를 높여갔다.”라고 기술된 것처럼 학교의 강의에서도 명성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정통한 한문에 대한 지식으로 집에 찾아와 한문·중국사·철학의 원전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의 교육에 대단히 열성적이었다.

1969년에는 동방고전연구원을 설립해 많은 제자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또한 이무렵 근대화의 물결에 한문학에 대한 학교교육이 소홀하게 되고, 한학자가 점차 줄어드는 시대상을 간파하고 고전국역사업을 제창해 민족문화추진회를 발족시켰으며, 이를 육성하는 데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한국당쟁사 韓國黨爭史》·《한국유교사》·《한국유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원효 스님의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 등이 있고 교열한 업적도 많다. 고전국역의 기반을 구축한 공로가 인정되어 1974년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銀冠文化勳章)을 받았다. 1977년 1월 1일 죽었다. 1979년 문하생들이 그의 유고를 모아 《한국사상논고 韓國思想論稿》를 발간했고, 광주공원에 있는 묘소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성내운(成來運)

1926∼1989. 교육학자·민권운동가로 충청남도 공주출신. 194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을 전후해 관계한 미국교육사절단의 강의협조활동과 가톨릭소신학교의 교편생활을 통해 민주자유와 인간존엄의 교육적 의의를 체득해 교육철학과 교육실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앙교육연구소 조사연구부장으로서의 연구생활과 미국교육계 시찰을 통해 다져진 교육신념을 가지고 1954년부터 성균관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강의하면서 새 교육운동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약했으며, 4·19와 5·16을 겪는 격동기에 문교부 수석장학관과 국가재건최고회의 교육정책담당 전문위원을 맡아보며 교육개혁에 헌신했으나 교육의 자율성을 손상하는 관권의 획일과 통일에 반대하고 사임했다. 그 뒤 교육연구와 후세양성을 위하여 대학 강단에 나섰다. 1963년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임명된 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 소아재활원 부설 국민학교장·학생처장·문과대학장·교양학부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서남동교수와 교수기도회를 주도한 뒤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저항적 민주·민권 운동가로 활약하게 되어 해직교수협의회 회장, 한국인권운동협회 회장, 한국공해문제연구소 고문, 민주교육실천협의회 공동대표로 활약했다. 이 과정에서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투옥된 바 있고, 교수직의 해직·복직이 거듭되는 등 고난을 겪었다. 1989년 광주경상대학장에 취임해 학교 발전에 힘쓰는 한편, 신념에 찬 민주교육 실천가로, 자주민권의 교수·운동가로 활약했다.저서로는 《한국교육의 증언》·《숙희에게-미국과 그 교육》 등 다수와 교육소설 《사랑을 위한 반석》과 《민주주의를 위한 집단교육》·《교육철학》·《민중교육의 본질》 등 다수의 역서가 있다.

성백선(成百善)

1914∼1977. 교육자·심리학자로 호는 일우(一愚), 경상북도 상주 출생. 1930년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전신)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민족운동으로 퇴학당했다. 1932년 4월 교남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가 1935년 3월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동년 4월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제이고등학원 문과 1학년에 들어간 뒤 1937년 4월 와세다대학 문학부 심리학과에 입학해 1940년 졸업했다. 일본 유학시절 그는 민족적인 가락에 흥미를 가져 시조공부에 몰두했으며, 졸업 후 1941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중동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제로부터 몰려났다.

광복과 더불어 1945년 10월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해 1948년 9월까지 근무하다가 1949년 4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1951년 10월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취임해 1955년 3월 동 대학을 떠날 때까지 교학국장을 지냈으며, 1955년 4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옮겨 1977년 5월까지 재직했다. 1974년 5월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일생동안 교직에 전심하여 단 하루도 강단을 떠난 일이 없었으며,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그와 같은 자기를 지켜나가려는 결신(潔身)의 지조를 지키려 했던 한국적 선비였다. 한국 심리학회 부회장, 서울아동상담소전문위원·소장, 대한정신건강협회 이사장,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한국 심리학회 회장, 고려대학교 부설 행동과학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성세영(成世英)

1885(고종 22)∼1955. 독립운동가로 대종교 중진의 한 사람. 호는 나옹(裸翁)이고, 경상북도 성주 출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곧 상경해 대종교에 입교한 뒤 고향에 성선시교당(星善施敎堂)과 월선시교당(月善施敎堂)을 세워 포교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때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벌였으나 고향을 떠나 쫓기는 몸이 되었다.

1945년 만주로부터 환국한 총본사(總本司)와 연락해 또다시 고향에 고선시교당(高善施敎堂)을 위시해 13개 교당을 세워 포교에 힘쓰던 중 6·25 사변을 맞았다. 휴전 뒤 고향에 다시 성주지사를 세웠고, 고선·자선·산선·문선 등 여러 교당을 부활시켰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교단에서는 정교(正敎)와 동시에 대형호(大兄號)를 수여하였으며, 성주지사 전무(典務)로 선임했다.

성우경(成禹慶)

성우경 : 개항기 광명 출신의 농민운동가.

성우경(成禹慶)[1842~1916]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시흥군 남면 유등리[현 광명시 학온동]에서 태어났다. 시흥군 남면 동학(東學)의 집강(執綱)으로 활동하면서 1898년(고종 35)과 1904년(고종 41) 두 차례에 걸쳐 다른 집강들과 함께 이른바 시흥농민봉기를 주도하였다. 1차 시흥농민봉기는 일본의 침략과 간섭이 노골화하던 1898년 7월 7일에 일어났다. 성우경은 송태현(宋泰鉉)·김회상(金會祥)[하북면 번대방 집강]·이동식(李東植)[서면 율일리 집강]·이덕정(李德鼎)[동면 봉천리 집강]·엄우영(嚴宇永)·나순길(羅淳吉)·나한녀(羅漢女)[상북면 당산리 소임] 등과 함께 시흥군 내 42명의 동·리 집강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리고, 전임 군수의 학정에 항의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7월 9일 각기 농민들을 동원하여 집회를 열고 1차 시흥농민봉기를 일으켰다. 1차 시흥농민봉기는 7월 28일에 일단 수습되었으나, 성우경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일본은 조선 정부를 협박하여 경부선 부설권을 독점한 뒤, 1901년(고종 38) 경부선 공사에 착공하여 1904년 개통하였다. 일제는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영등포~수원 간 공사에 시흥군민을 강제로 동원하는 한편, 철도 연변(沿邊)의 토지를 무상으로 수용하였다. 이에 군민들은 일제의 탄압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우경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침탈과 친일 관리들의 비행에 분개하여 2,000여 명의 군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2차 시흥농민봉기를 일으켰다. 먼저1904년 9월 13일까지 6개 면 집강들에게 봉기 계획을 전달하는 한편, 시흥군내의 모든 가구마다 1명씩 반드시 집회에 참여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9월 14일 수천여 군민이 읍내 한천(漢川) 변에 집결하여 성유경의 사회로 집회를 열고 노무자를 모집한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하였다.

집회에 참가한 군민들은 이날 오후 3시경 시흥 관아로 몰려가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때 관아와 그 주변에 일본군 20여 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시위대가 몰려오자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흥분한 군민들은 투석전으로 맞서 군수 박우양(朴嵎陽) 부자가 희생되고, 일본인 2명이 참살되었으며 4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후 일본 군경이 증파되어 각 마을마다 군민들의 동정을 감시하는 한편, 주동자들을 색출하여 검거하였다.

성우경은 체포되어 경기재판소에서 주모자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서대문교도소에서 복역하였으며, 2년 후 한성재판소에서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하는 천추경절(千秋慶節)을 맞아 평리원의 기결수석방령(旣決囚釋放令)에 따라 고령임이 고려되어 특사로 풀려났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성인기(成仁基)

1907∼1966. 언론인·정치가로 충청남도 아산 출신. 아버지 환중(煥中)과 어머니 최치만 사이의 5남매 중 맏아들로 300섬지기 농가에서 출생했다. 16세에 서울로 중학시험을 보러 떠나기 20일 전에 이기순과 결혼했다.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중동학교에 입학했으나, “서울 공부의 학비는 대주지 못한다.”는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일본인 회사에서 학비를 벌며, 한때 선린상업학교의 야간부에서 학업을 보충하면서 중학교 학업을 마쳤다. 중동학교에서 교장이던 최규동의 도움으로 일본유학 교비생으로 뽑혀, 1933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귀국해 최규동으로부터 언론계 진출을 권유받아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가 그해 12월부터 언론계생활이 시작되었다. 입사해 4년 동안 사회부기자로 활동했으며, 1938년 8월에 편집부기자, 같은 해 12월에는 논설위원으로 사설을 집필하기도 했으며, 1940년 8월에는 편집부차석이 되었다. 이때 조선일보가 폐간을 당해 약 3개월 휴면했다가, 1940년 11월 매일신보에 입사해 지방부장을 거치며 광복을 맞았다. 1940년 본부인과는 사별하고, 1941년 김수한과 재혼했다.

광복 후 조선일보 복간사업에 참여해 1945년 9월 재입사 후 편집책임을 맡았으나 3개월 만인 1946년 2월 사상관계의 모함을 받아 주저함이 없이 회사를 떠났다. 같은 해 3월 성재경(成在慶)이 운영하던 대성출판사 고문으로 들어가 밀(Mill, J. S.)의 《자유론》, 손문의 《삼민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 등 정치사상 서적 5권을 번역해 간행했다. 1950년 2월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로부터 세 번째 부름을 받아 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6·25동란이 발발, 인민군의 조선일보사 검색으로 직원 80여명이 북괴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루고 풀려난 일이 있으며, 같은 해 8월 5일 적치하의 서울을 탈출해 향리인 아산으로 피신했다.

1951년 1월 조병옥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지에서 조선일보를 발간했다. 같은 해 4월에는 수원에서 전시판을 발간했으며, 1958년 11월 천관우에게 편집국장을 물려주기까지 10년 가까이 조선일보로서는 최장수 편집국장을 지냈다. 그 뒤 부사장으로 만 2년 동안 재임했다. 4·19가 나던 1960년 7월 국회의원 총선에 향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듬해인 1961년 한국일보사 부사장으로 취임해 주필을 겸임했고, 1963년 민주공화당의 창당발기인이 되었다. 그해 11월 서울 영등포에서 공화당 공천을 받고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같은 해 5월 당무위원, 12월 정책위원을 거쳐 1964년 12월 홍보분과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성재한(成載翰)

1860(철종 11)∼1906. 일명 재평(載平). 한말의 의병으로 충청남도 예산 출신.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발표되자 예산·홍성·보령 등지를 전전하며 항일투쟁을 위한 동지규합과 여론조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4월 민종식이 홍산 지치에서 의거한 소식을 듣고 그 휘하에 들어가 박제현과 함께 운량관(運糧官)에 임명되어 홍주 입성전에 참전했다.

그 뒤 홍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보병·기병 등 많은 병력으로 성을 공격해왔다. 며칠간 성을 사수했으나, 4월 9일 새벽 적의 강력한 화약 사용으로 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주장(主將)인 민종식은 피신했으나, 그는 전태진·서기환·전경호·유준근과 함께 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일본군의 총탄 앞에 육탄으로 대항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성하식(成夏植)

1881(고종 18)∼1958. 대종교 중진의 한 사람이며 교육가로 호는 만취(晩翠). 경상북도 상주 출신. 어려서부터 고향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908년 김천의 계산측량학교를 졸업한 뒤 측량업에 종사했다. 1911년 광신학숙에서 2년간 교육에 진력하다가 1913년에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했다. 다음해에는 몽강현에 신창소학교를, 1916년에는 화전현에 길창소학교를 세우고, 1919년에는 무송현에서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했다.

1921년 대종교를 신봉해 1924년 참교, 1931년에 지교, 1947년에는 정교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형호를 받았다. 그동안 1922년 부여현에 삼성시교당과 삼흥학교를, 1926년 빈현에 신흥소학교를, 1929년 유수현에 유성시교당과 부속소학교를 각각 설립해 직접 시무했으며, 총본사 전범, 밀산구 순교원, 총본사 전강, 경의원 참의 등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도 총본사 전범, 원로원 부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57년 상주지사 전무가 되어 시무하던 중 죽었다. 1977년 생전의 공적으로 대통령표창을 수상했다.